community

엄마들잡지_2015 3월호

2017.06.23 조회수 : 369

나의 첫사랑 이야기

어릴적 내 친구 안석표... 그 아이의 이름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표” 발음을 잘못하여 “포” 라고 발음
하시던 분들도 더러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광산업을 하시는 아버지 사업지를 따라 강원도 두메산골로 전학을 갔다. 학교 앞 뒤
로 산이 막혀 있었고 학교 앞 신작로 옆에 졸졸 개울물이 흐르는 평화로운 시골마을 학교였다. 3학년
학기 초라고 기억하는데 아직도 구구단을 못 외우는 아이에 방과후 나머지 공부를 하는 아이도 있었다.
전학 온 학생이 보통은 기죽어 얌전히 지내기 마련인데 나는 구구단 쯤 벌써 외우고 또 조금 큰 도시 학
교에서 전학 왔다는 묘한 우월감에 기가 죽기는 커녕 여유만만하게 학교 생활을 한 것 같으다.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인사를 시킨 뒤에 지정해 준 자리가 석표 옆자리였다.
석표는 얌전하고 하얀 얼굴에 언제나 누런코를 매달고 있었다. 앞섶에 손수건을 꽂고 다니던 일학년의
모습을 3학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하고 다닌 내짝이었다. 전학을 가서 서너달 지나 여름방학이 다가올
무렵 어느날 석표가 방과 후에 자기 집에 놀러가자는 제안을 하여서 나는 석표네 집을 가보기로 하였
다. 흙먼지 나는 신작로를 따라 한참을 가다가 산길로 접어들고 산골짜기를 거슬러서 땀을 흘리며 한
참을 올라가니 인가없는 산 속에 외딴 절이 하나 있었다. 석표는 그 절에 늙으신 보살님 아들이었다.

스님들을 형이라 부르며 석표는 어른들에게 귀염을 많이 받으며 살고 있는 아이였다. 스님들이 석표친
구 왔다고 산딸기도 따다주고 절구경도 시켜주며 옛날 이야기도 해주셨다. 절 마루에서 둘이 같이 숙제
도 하였는데 부엌에서 일하시던 석표 어머니가 산에서 방금 꺽은 옥수수를 쪄 주셨다. 그런데 그 옥수
수맛이 어찌나 달고 맛나던지 지금도 혀에 삼삼이 되살아 나고 이따금 시골 촌부가 길가에서 삶은 옥수
수 파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 기억이 떠오른다. 우리의 추억은 때로 혀끝에 새겨지나보다. 맛나게 먹는
모습을 그윽히 보시던 석표어머니가 “영희야! 우리 석포가 학교 갔다 오면 맨날 영희 니 이야기 한다.
우리 석포하고 친하게 지내거라이... ” 하시며 당부하시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석표어머니의 당부와 남
다른 환경에서 학교에 다니는 짝궁에 대한 나름대로의 배려로 공부도 가르쳐주고 코 풀라고 휴지도 건
네주는 등 더욱 그 아이와 친하게 지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멀리 산사에서 학교를 다니며 나를 좋아했던 석표는 아련한 동화 속 주인공처럼 내 마음 한켠에
어슴프레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고학년이 되는 4학년부터 글짓기부에서 특별활동하던 나는 글짓기부
선생님이신 한장수 선생님께 귀염을 많이 받았는데 교실 뒤 게시판에 내 글을 게시하고 칭찬해 주시며
방과 후에는 선생님의 자전거 뒤꽁무니에 매달려 집에 데려다 주기도 하셨다. 학교 뒷뜰 토끼풀 가득핀 잔디밭에 엎드
려 선생님 품에 안겨서 사진을 찍은 기억도 난다. 한껏 멋을 낸다고 리본 달린 헤어밴드를 하고 찍었던 사진 속 나의 표
정을 잊지 못한다. 사진은 기억보다 더 생생하게 그 시간과 그 때 감정을 말해준다.

그렇게 선생님 귀염을 독차지하다가 5학년을 마치고 다시 전학을 갔다.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우리 형제들은 자주 전학
을 다녔었다. 그 학교는 전혀 분위기가 다른 시골학교였는데 6학년 과정 1년을 다닌 후 졸업 후에 내가 서울로 중학을
갔다가 방학때 집에 내려와 보니 한장수 선생님은 그 학교로 전근 오셔서 내 막내 동생의 담임이 되어 계셨다.
선생님께 귀염 받던 기억이 사춘기 소녀의 미묘한 연정으로 변해서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선생님 내가 클 때 까지 제
발 장가 가지 말고 기다려요!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웃음이 나오지만 그때는 참 절절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어느 겨울방학 결혼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낙심하여 선생님 신혼 집 창문에 비치는 빠알간 불빛을 멀리서 바
라보며 다리에 홀로 서서 물위로 떨어져 흔적없이 사라지는 눈꽃송이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상심의 눈물을 흘렸었다.
그 때 그 사춘기소녀가 몇 십년이 흘러 조산사가 되어 춘천에 가정 분만을 하러 왕진을 갔는데 우연히 산모집 아파트 입
구에 걸린 플래카드에서 한장수 선생님의 이름을 발견하였다.
선생님은 강원도 교육감으로 두 번째 피선되셔서 축하 현수막이 동네에 걸린 것이었다. 마침 산모의 친정아버지가 한장
수 선생님과 동기이시고 절친 사이여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전화번호를 알려 주셔서 반가운 마음에 전화
를 걸면서 나를 기억이나 할까? 생각 했는데 뜻밖에도 나와 내 막내 동생을 함께 기억하고 계셨다. 첫 부임지에서 듬뿍
사랑을 쏟아부어 주셨던 제자를 잊지 않고 계셨던 것이었다.

그날 밤 오랜 진통 끝에 초산모의 귀한 아기를 받아주고 새벽에 서울로 돌아와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더니 흰머리 가
득한 그분의 인자한 모습 속에서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졌다. 산후조리원 사업을 시작 하기 전의 일이니 한 십년도 더 이
전의 일 이었나보다. 석양 빛 비치는 인생의 황혼기에 되돌아 보게되는 아름다운 한 장의 사진같은 추억이다. 한 숨 돌리
기도 팍팍한 일상 속에서 때론 추억이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기도 한다. 내 어릴 적 눈깔사탕 사랑도, 수줍었던 선생님
에 대한 마음도 지금은 아련한 기억뿐이지만 말이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생애 가장 고단한 시간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초보 엄마들에게 나는 지금의 고단한 시간이 세월
이 많이 흐른 후에는 가장 달콤한 추억의 시간이리라는 얘기를 꼭 해주고 싶다. 더불어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시간이리라는 얘기도 함께...

목록